작년 10월, 저는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 위치한 임진강 댑싸리 공원을 처음 찾았습니다. 2만여 그루의 붉은 댑싸리와 가을 하늘이 선사한 황홀한 풍경을 혼자 걸으며 느꼈고, 그날의 설렘과 감동을 기록으로 남깁니다.
첫 발걸음부터 압도된 화폭 같은 풍경
작년 가을, 구름 한 점 없이 투명하던 10월의 하늘 아래 나는 혼자 운전해 임진강 댑싸리 공원을 찾았다. 삼곶리로 향하는 도로는 양쪽으로 황금빛 벼 이삭이 흔들렸고, 산 능선은 시월 특유의 선명한 코발트색으로 빛났다. 안내 표지를 지나자마자 주차장은 이미 만차라 다소 떨어진 임시 구역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에서 공원까지 길을 걷는 동안 “조금 늦었나” 싶었지만, 댑싸리 물결이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순간 그 아쉬움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초록에서 붉은 기로 완전히 바뀐 댑싸리 군락이 언덕을 뒤덮고 있었고, 햇살이 잔털 같은 잎 끝을 금빛 실선으로 감싸자 공원 전체가 거대한 수채 팔레트를 펼친 듯했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댑싸리가 물결치면 붉은 파도가 언덕을 ‘훑’ 하고 넘어가는 장면이 펼쳐졌고, 나는 휴대폰 카메라를 키려다 결국 화면을 덮고 눈으로만 풍경을 담았다. “현실이 과장이구나”라는 감탄이 저절로 튀어나왔고, 잠시 후 의식적인 숨을 내쉬니 붉은 색조와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가 한꺼번에 폐 깊숙이 번졌다.
붉은 바다 사이 산책, 꽃들과 바람이 이룬 다층적 감각
나선형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붉은 곡선을 구석구석 눈에 새겼다. 전망 데크 위에 서니 댑싸리 물결이 임진강 건너 녹음 짙은 산과 맞붙어 색 대비의 극점을 보여 주었다. 한쪽에는 코스모스·천일홍·백일홍이 섞여 있어, 분홍·보라·주홍 점묘를 얹은 유화 같았다. 머리 위로 잠자리가 날아다니고, 바람이 옷깃을 스칠 때마다 댑싸리 잎사귀가 사각거리며 사람 목소리를 흡수해 공간을 더 고요하게 만들었다. 한 시간 이상 걸어도 군락이 끝날 기미가 없었다. 흙길과 데크 길을 번갈아 밟으며 숨을 돌릴 때마다 코끝엔 흙과 꽃의 혼합 향이 깊어졌다. 사진 삼각대를 세우고 셀프 타이머로 몇 장을 남겼는데, 파란 하늘·붉은 숲·나 하나만 담긴 프레임이 비현실적인 엽서처럼 보였다. 계단을 내려오는 길, 붉은 군락 안쪽에서 바람이 일 때마다 잎 끝 붉은 먼지가 햇살 속에 반짝이며 작은 폭죽처럼 터졌다. 사진은 적당히 찍고, 슬슬 목이 마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 노점 거리에 들러 감자전 한 장과 얼음이 둥둥 뜬 과일 에이드를 주문했다. 바삭한 전과 달콤한 음료가 달궈진 내장과 혀끝을 즉각 식혀 주었고, 평상에 앉아 구름 없는 가을빛을 바라보며 “내년에도 꼭 오자”는 혼잣말을 적어 두었다.
되돌아가는 길, 남겨진 붉은 잔상과 약속
늦은 오후, 붉은 댑싸리가 진홍빛으로 깊어질 무렵 차로 돌아왔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가을 들녘 냄새가 이마 땀방울과 섞여 실내로 들어왔다. 도로 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지나며 눈을 감았다 뜨니, 방금 전 붉은 물결이 눈꺼풀 안쪽에 또렷이 재생되었다. 읍내 마트에 들러 시원한 음료와 간식거리를 사고 집에 도착해 노트북에 사진을 옮겼다. 모니터 속 장면은 실제보다 더 화려했지만, 그 화려함이 현실이라는 근거가 마음을 묘하게 따뜻하게 했다. 노트 앱을 열어 “붉은 곡선, 파란 하늘, 꽃 향, 기름 냄새, 돌아오는 길 따뜻한 바람”이라고 적고, 이 다섯 조각이 오늘 하루의 기록의 자리에 조용히 스며들도록 저장했다. 올해 10월, 꼭 다시 이 붉은 바다를 찾겠다는 약속을 마음속에 접어 두며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얼마 남지 않은 10월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갈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