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의 당포성은 문화유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는 조용히 시간을 정리할 수 있는 익숙한 공간입니다. 아침, 오후, 저녁, 새벽, 어느 시간에 가든 각기 다른 표정으로 맞이해 주는 이곳은 내 일상 속에서 가장 자주 걷는 길이 되었습니다.
언제든 괜찮은 그곳, 자주 걷는 당포성의 길
연천에 자리한 당포성은 누군가에게는 역사적인 장소이고, 누군가에게는 별을 보기 위한 유명한 스팟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르다.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나는 이곳을 자주 걷는다. 아침이든, 오후든, 해가 질 무렵이든, 새벽이든 — 어느 시간이든 당포성은 같지만 다른 모습으로 나를 맞이한다. 마치 매일 조금씩 다른 기분을 가진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산책로라기보다는 작은 공원의 느낌이 더 가까운 이곳은 탁 트인 전망과 절벽 아래로 흐르는 임진강, 그리고 성벽 위쪽에 자리한 전망대와 홀로 선 팽나무까지. 정적인 풍경이지만,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머무르게 된다. 나는 이 공간을 돌며, 복잡한 생각을 정리한다기보다 그냥 다시 ‘리셋’하는 기분에 가까운 걸 느낀다. 길게는 한 시간, 짧게는 삼십 분 정도.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지 않아도 충분한 시간이 된다.
시간의 색깔 따라 변하는 풍경과 마음
아침에 당포성을 찾을 때는 여전히 조용한 기운이 남아있다. 햇살이 나무 사이로 비쳐 들어오고, 이슬이 마르기 전의 공기는 맑다. 강가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하루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기운을 안겨준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고, 그 조용함이 더 좋다. 오후에 찾게 되면, 햇빛은 조금 더 따가워지고 풍경은 선명해진다. 임진강 물빛은 밝게 반짝이고, 성곽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기분 좋다. 이 시간대에는 하늘을 오래 쳐다보게 된다. 흰 구름이 흘러가고, 새들이 날고,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비워지는 기분이다. 노을이 질 무렵의 당포성은 특히 인상적이다. 붉고 주황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성벽과 팽나무는 고요하지만 단단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그 장면을 바라보다 보면 내가 어떤 고민을 했는지도 잠깐 잊게 된다. 바람은 조금 더 차가워지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이 풍경을 지나친다. 가끔은 밤늦게, 혹은 새벽녘에 이곳을 찾기도 한다. 하늘이 맑은 날에는 별이 정말 많이 보인다.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땅에 있는 건지, 우주에 떠 있는 건지 모를 만큼 어지럽다. 그 감각이 낯설지만 나쁘지는 않다. 완전히 멈춰 있는 것 같은데, 뭔가 계속 흐르고 있는 느낌. 별 하나하나가 너무 선명해서, 내 마음속도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익숙한 공간이 전해주는 다정한 여백
누군가에게 당포성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찾는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이곳은 아무 이유 없이 가도 괜찮은 곳이다. 늘 똑같은 풍경이지만, 시간대마다 그 분위기는 달라진다. 조금 더 피곤한 날에는 오래 걷지 않고, 생각이 많아질 때는 팽나무 옆에 오래 서 있다. 매번 새로운 무언가를 느끼는 건 아니지만 그저 있는 그대로의 공간이 그날의 나를 조용히 받아주는 듯하다. 그래서 자주 걷게 된다. 아무런 계획도, 정해진 감정도 없이 그저 이곳의 하늘과 강과 바람과 별빛 속에서 내 마음도 잠시 머물다 간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 당포성의 바람은 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 바람을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에 또 걷게 될 길을 이미 기다리고 있다. 이 평범한 길과 그 안의 감정을 우리는 조용히 모은다. 그 순간들이 곧, 우리의 '기록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