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 왕징면과 군남면 사이를 흐르는 임진강. 그 강을 따라 걷는 길은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고 있습니다. 왕징면에서는 머릿속을 비우고 감각을 깨우는 산책을, 군남면에서는 천천히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때로는 풍경에 집중하며 아무 생각 없이 머무르기도 합니다. 고양이들과 바람, 그리고 멀리 보이는 강물의 흐름까지. 나는 이 길에서 복잡한 마음을 잠잠하게 다독입니다.
강바람이 머리를 비우는 왕징면 산책길
내가 가장 자주 걷는 길은 연천군 왕징면 쪽 임진강 강가다. 이 길은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짧기 때문에 더 자주 찾게 되는 산책길이다. 강은 정말 바로 옆에서 흐른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고개를 돌리면, 눈앞에 잔잔한 물결이 반짝인다. 강바람은 얇은 옷 사이를 스치며, 그날의 감정까지 털어내는 듯하다. 왕징면 길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고양이다. 길가 곳곳에 고양이들이 앉아 있다. 누구는 자고 있고, 누구는 걷는 사람을 조용히 쳐다본다. 나는 그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이 길이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하나의 작은 풍경처럼 느껴진다. 여기는 생각을 정리하는 곳이라기보다는, 머릿속을 비우는 곳이다. 시선이 가까운 곳에 머물고, 나의 귀는 바람 소리와 고양이 발소리에 집중된다. 나도 모르게 감각을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마음도 고요해져 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이 길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걸으면 기분이 나아지기 때문이다. 특별한 목적 없이도 걸을 수 있고, 어떤 감정도 설명하지 않아도 받아주는 공간이다. 특히 푸름이 가득한 계절에는 이 감각이 더 또렷하다. 바람은 선명하게 불고, 풀냄새는 더 짙어지고, 햇살도 가볍지 않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더욱 아무 생각 없이 걷게 된다. 그게 이 길이 가진 힘이다.
길어진 거리, 정돈되는 마음 군남면 산책로
군남면 쪽의 임진강 산책로는 훨씬 길다. 진상삼거리에서 시작해 북삼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약 4km 정도 된다. 왕복하면 8km, 천천히 걸으면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러간다. 길이가 길기 때문에 걸음도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생각을 정리한다. 왕징면처럼 감각이 먼저 살아나는 느낌은 덜하지만, 군남면의 길은 마음속을 하나씩 꺼내 보는 데 적합하다. 강은 여전히 옆에 있지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흐른다. 그 거리감 덕분인지 나는 내 감정도 멀리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군남면도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감각을 품는다. 특히 벚꽃이 만개하는 봄이 오면 이 길은 산책로라기보다 하나의 정적인 풍경이 된다. 걸음을 멈추게 할 만큼 예쁜 벚꽃들, 그리고 그 풍경과 어우러지는 강 주변의 고요함. 그 시기에는 걷기보다 감상하게 된다. 생각을 정리하려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그냥 그 장면 안에 머무르게 된다. 예쁘다는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는 조용한 감동이 있다. 그럴 땐 나는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한 자리에 서 있거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바람이 불고 꽃잎이 날리는 장면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이다. 군남면의 길을 걸을 때 나는 혼자다. 누구와 함께 이야기하기엔 너무 길고, 조용하다. 그래서 생각도 길어진다. 걷다 보면 지난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어색하지 않게 정리가 된다. 벤치에 앉아 멀리 흐르는 강을 바라보는 시간이 있다. 그 순간만큼은 무엇도 쫓아오지 않으며 고요하다. 나는 그 고요 속에서 나를 정리한다. 특별히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그 풍경이 마음속에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 생각은 정리되고, 나는 다시 나로 돌아온다. 이 길은 혼자 걷는 데 익숙해지는 길이다. 걸음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지고, 길의 끝에 다다를 즈음이면 나를 조금 더 잘 알게 되는 기분이 든다.
고양이와 강바람 사이, 나만의 조용한 시간
연천 임진강을 따라 걷는 이 두 길, 왕징면과 군남면은 각각의 방식으로 나에게 조용한 시간을 준다. 왕징면에서는 오감이 열리고, 감각이 앞선다. 바람, 소리, 거리의 고양이들. 그런 장면 속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걸을 수 있고, 그래서 좋다. 특히 푸르름이 가득한 여름철, 강가에 풀들이 우거지고 바람이 세게 불면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내려놓게 된다. 반대로 군남면에서는 생각이 하나씩 정리된다. 걸음이 길어질수록 머릿속이 정돈된다. 그리고 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시기에는 오히려 생각이 멈춘다. 풍경이 너무 선명해서, 감정이 그 앞에서 잠시 멈추는 순간. 나는 그럴 때 벤치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바라본다. 그 장면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두 길 모두 다른 방식이지만, 공통점은 ‘나를 다독이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말 걸지 않고, 무엇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걸으면 된다. 내가 어디에 있든, 그 자리에 어울리는 풍경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 길들을 ‘기록의 자리’라고 부른다. 특별한 일은 없지만, 특별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곳. 그렇게 조용히 이 길을 걷는다. 바람이 불고, 고양이가 지나가고, 강이 흐른다. 그리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속에 조용히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