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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벤치에서 별빛을 보다

by 방구석기록자 2025.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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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저녁 벤치에서 별을 보다

 

여름 해가 산 뒤로 사라지면 마당 벤치 위에는 따끈한 공기와 노을빛이 얹히고, 곧이어 풀내음·매미 소리·별빛이 시간을 인계합니다. 저는 그 흐름 속에서 하루의 더위를 식히고, 조용히 ‘기록의 자리’를 완성합니다.

뜨거웠던 낮을 덮는 노을, 벤치가 만든 무대

해가 길어진 여름 저녁, 오후 일곱 시이면 마당 벤치가 가장 먼저 주홍빛을 받는다. 논밭 위로 무더운 공기가 아지랑이를 만들다가, 해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가면 그 열기가 살짝 누그러진다. 벤치에 앉으면 땀방울이 금세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데, 아직 뜨거운 지면에서 올라오는 복사열과 뒤쪽 산자락에서 스며드는 서늘한 그늘바람이 동시에 살갗을 스친다. 산 능선을 따라 퍼지는 주황빛은 구름 없는 하늘을 붉게 그러데이션 하고, 마지막 잔광이 논물 위에 반사되면 들판 한가운데에 불타는 강이 생긴 듯하다. 삼나무 그림자는 노을빛에 길게 늘어나 벤치 아래로 드리워지고, 그 그림자 끝에 여름내 자란 잡초들이 엷은 실루엣을 만든다. 마당 옆 화단의 백합 잎은 낮 동안 머금은 열기를 내뿜으며 잔뜩 늘어져 있지만, 꽃송이는 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듯 고개를 돌린다. 손에 든 시원한 얼음물 컵에 물방울이 맺히고, 그때부터 벤치 주변은 이상하리만큼 느려진다. 낮 내내 작열했던 햇살이 잔광 한 줌으로 줄어들자 발뒤꿈치로부터 열이 빠져나가고 마음도 함께 식어 간다. 매미가 높은 나무에서 “잘 가라 햇님”을 외치는 듯 울어대고, 그 소리가 잦아들 무렵 들려오는 풀벌레들의 울음은 여름밤 개막을 알리는 북소리 같다. 해를 배웅하며 속으로 문장을 하나씩 적는다. “뜨거운 낮이 물러갈 때, 나도 내 안의 불필요한 열기를 내려놓는다.” 벤치는 그 문장을 앉은키 높이만큼 위로 올려 두고, 세상과 나 사이에 완만한 거리를 만들어 준다.

저녁 식사 이후, 별을 기다리는 온도와 소리

노을을 배웅하면 집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저녁을 차린다. 편의점에서 사온 간편 냉면에 얼음 한 줌을 띄워 먹고, 본가에서 가져온 여러 반찬들을 입 안에 넣으면 낮 동안 지쳤던 미각이 되살아난다. 식사를 마친 뒤 그릇을 헹구는 물살에서조차 따뜻함이 남아 있어 느낌이 이상하다. 다시 벤치로 나오면 공기는 낮보다 묽어졌지만 아직 축축한 열기를 지니고 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자 기온이도 덩달아 조금은 내려앉는다. 논둑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달궈진 피부에 시원한 막을 씌우고, 그 순간 비로소 하루의 더위가 뒤로 물러난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별자리 앱을 실행한 뒤 화면을 하늘에 포개놓는다. 북두칠성 국자 모양이 화면에 나타나고, 그 틀에 맞춰 맨눈으로 별을 찾아본다. 주황색 공기가 사라진 자리를 남색이 채우더니, 어느새 보랏빛이 스며들며 사방이 검고 깊은 밤으로 넘어간다. 벤치에 몸을 기댄 채 시원한 커피를 마시면 땀이 식는 대신 가벼운 닭살이 올라온다. 바람 끝에는 저녁을 마친 고양이 울음이 날카롭게 섞여 들고, 마을 가로등이 한두 개 켜질 때쯤 벤치 주위 묘한 적막이 생긴다. 그 적막을 깨는 것은 논밭에서 불어오는 풀벌레 합창이다. 들판을 둘러싼 산은 낮보다 더 어두운 윤곽으로 솟아 있고, 하늘은 별빛으로 서서히 채워진다. 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숨을 깊게 들이쉰다. 풀냄새, 흙냄새, 따끈한 지면에서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 그리고 별빛처럼 미세한 먼지가 공기를 촘촘히 채운다. 별자리 앱 화면을 끄면 손바닥 화면이 캄캄해지고, 그때부터 별은 맨눈만으로도 더 선명하다. 카시오페이아의 W 자리에 손끝을 맞추고, 남동쪽 높이 떠오른 안타레스 붉은 별빛을 확인한다. 그 밝음은 태양빛과 전혀 다른 온도로 내 눈에 박히고, 마음 한쪽 구석을 문득 차갑게 만든다. 발밑 벤치가 서걱이며 나무 특유의 냄새를 풍긴다. 나는 그 냄새를, 황톳빛 기운이 남은 공기와 섞어 두었다가 글감으로 꺼내 쓰기 위해 머릿속 서랍에 조용히 보관한다. 이렇게 시간을 쌓아 두면, 계절이 바뀌어도 꺼내 볼 수 있는 향기가 된다.

밤하늘이 완성된 시각, 하루가 부드럽게 정리되다

밤 열 시가 넘자 마을 가로등이 하나둘 깜빡이며 켜진다. 노란 불빛 아래 날벌레가 작은 소용돌이를 이루고, 낮 동안 쉼 없이 울던 매미 대신 풀벌레 소리가 논둑을 가득 채운다. 바람은 한낮처럼 여전히 미지근하고, 벤치 목재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다리 뒤를 살짝 눌러 준다. 땀이 다 마르지 않았지만 눅진한 공기 속에서 피부가 오히려 편안해진다. 하늘 한복판에 떠 있는 북두칠성이 천천히 기울면서 동쪽 끝에 자리 잡은 카시오페이아와 시소를 탄다. 그 사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괜히 은하수가 아주 흐릿하게 틈을 메우고 있는거 같다. 가만히 눈을 맞추면 별빛이 명멸하는 리듬이 들릴 것처럼 고요하다.

나는 오늘 하루를 떠올린다. 새벽에 피트니스 센터 문을 열고 공기를 가르며 몸을 깨웠던 순간, 오후 내내 달궈졌던 마당을 식혀 준 짧은 노을바람, 그리고 지금 완전히 어두워진 논 위로 투명하게 내려앉은 밤공기. 땀 냄새와 풀내음이 뒤섞인 이 시간은 하루가 차곡차곡 접힌 결과물 같은 느낌이다. 내일 아침에도 다시 러닝화 끈을 조여 매고, 해가 들기 전에 한 세트 더 몸을 채우겠지. 그 예고편이 별빛처럼 희미하게 마음속에 떠 있다.

집 안 불은 켜지 않았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실은 더 없이 고요하다. 벤치에 몸을 기대고 숨을 천천히 들이쉬었다가 놓는다. 들숨마다 오늘의 온기가 다시 한번 몸 안을 순환하고, 날숨마다 남은 피로가 밖으로 스며든다. 이제야 하루가 부드럽게 정리된다. 나무로 만든 벤치는 내가 앉아 있던 체온을 천천히 되돌려 주면서 “오늘을 여기까지 잘 끌어왔다”는 묵직한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가슴 언저리에 가만히 저장해 두고, 머릿속에 짧게 메모한다. 낮의 열기, 주홍빛 노을, 검푸른 밤하늘, 그리고 벤치에 남은 미세한 진동까지 이 모든 것이 오늘의 기록의 자리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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