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의 작은 마을에 눈이 소복이 쌓이면 들판과 산맥이 순식간에 하얀 도화지로 바뀝니다. 저는 민박을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아침부터 길목의 눈을 치우느라 분주하지만, 노동이 끝난 뒤 마을을 두른 산과 넓은 논밭이 만들어 내는 순백의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안도와 차분함을 느낍니다. 눈송이가 햇살에 반짝일 때 전해지는 겨울 특유의 포근함과, 눈발 속에서 고립을 자청하며 오롯이 고요를 만끽하는 경험은 도시 생활에서는 얻기 어려운 여백이 됩니다.
하얀 풍경이 시작되는 새벽, 노동과 설렘이 함께 쌓이다
새벽 다섯 시, 창틀을 울리는 미세한 진동에 눈을 떴다. 현관문을 열어 보니 마당은 발목 높이까지 차오른 눈으로 덮여 있었고, 울타리 너머 논밭은 어느새 하나의 흰 평면이 되어 있었다. 아직 어둠이 덜 걷히고 있었지만, 고요한 새벽 공기가 피부를 순간 얼려 놓았다. 저 멀리 보이는 가로등 불빛 속에서 눈송이는 끝없이 날아들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얼음 결정이 코끝을 간질였다. 민박 길목은 손님들의 첫인상이자 안전 통로이기에 나는 삽자루를 단단히 쥐었다. 삽이 눈을 밀어낼 때마다 묵직한 감각이 어깨를 타고 내려왔다. 귀까지 빨개질 즈음, 먼 산마루가 희끄무레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산 능선을 따라 지붕도 흰 모자를 쓰고 있었고, 들판 중간에 서 있는 외딴 나무는 하얀 두꺼운 옷을 껴입은 듯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푸른빛 속에서 눈 밑 그림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세상이 레이어 한 겹으로 납작해진 것 같았다. 삽질이 길어질수록 등줄기에는 땀이 차올랐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나는 오히려 몸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통로 끝이 드러날 때쯤, 동쪽 능선 위로 주황색 띠가 스며들었다. 햇살은 영하의 공기에 반비례하듯 따뜻했고, 눈송이가 빛을 받아 미세하게 반짝였다. “이 길이 손님들의 하루를 안전하게 시작시켜 주겠지.” 짜증과 땀방울이 동시에 증발해 버린 순간이었다. 작업을 마치고 마당에 서서 숨을 고르는데, 한낮처럼 밝지는 않아도 새로운 하루가 막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립을 선택한 오후, 순백 들판에 마음을 내려두다
눈길을 다 치운 뒤 나는 집으로 들어와 나만의 정비를 했다. 그날은 손님이 없는날. 나는 스스로 하루를 ‘고립 모드’로 전환했다. 난방기를 켜고, 거실 조명을 낮춘 뒤 가장 푹신한 담요를 어깨에 걸쳤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도화지가 아닌 널찍한 논밭과 그 논을 둘러싼 산 줄기였다. 바람 한 점에도 눈가루가 들판 위를 가로지르며 들썩였고, 햇빛이 비칠 때마다 눈 표면은 비늘처럼 반짝였다.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커피를 마시며 풍경에 시선을 붙들어 두었다. 새하얀 논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깨끗했지만, 그 위를 스치는 바람 자국이 눈결을 살짝살짝 바꾸었다. 산 능선은 눈 덮인 나무 때문에 선이 흐려졌고, 멀리 있는 전봇대조차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었다. 잠시 눈을 감으면 귓속을 때리는 것은 난방기 팬이 돌아가는 낮은 진동뿐이었다. 모든 정보가 최소로 줄어든 공간, 오히려 그 안에서 마음은 명료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온몸에 퍼졌다. 담요를 목까지 끌어올리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자 햇살이 점점 따뜻한 크림색으로 변했다. 눈은 낮은 각도의 빛을 받아 논밭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흰빛과 어두운 회색이 넓은 평면에 리듬을 만들었다. 산 아래서 들려오는 기계 소리나 자동차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까닭에, 내 호흡이 유일한 시간 지표가 됐다. 그때의 나는 감정을 글로 옮기기 전, 머릿속에 가만히 저장했다. 장면마다 색을 정리하고, 온도를 분류하고, 그 위에 얹히는 감정의 층을 음미했다. 그 기록은 손으로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 키보드를 두드릴 때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고립을 선택한 오후였지만 조금도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이 불필요한 말을 모두 덜어내주고 정갈한 정적을 남겨 주었다.
저녁빛으로 물든 들판, 기록의 자리로 스며들다
해가 산등성이의 중턱을 넘어가자 들판은 서서히 라벤더빛으로 바뀌었다. 낮 동안 따뜻했던 겨울 햇살이 사라지고, 공기는 다시 차갑게 굳었다. 나는 현관을 나서 장화를 신고 마을 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발등까지 올라온 눈이 “폭” 하는 소리를 내며 꺼질 때마다 그 뒤로 동그란 구멍이 맺혔다. 눈밭은 계속 달라졌다. 처음엔 순백이던 평면이 보랏빛을 머금고, 이내 흑청색과 회색이 번갈아 들판을 덮었다. 빛이 바뀌며 같은 풍경이 다른 표정을 짓자 나는 그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논 가장자리에는 까치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산 능선 위에는 별이 하나둘 떠올랐다. 눈빛에 반사된 별빛이 들판을 작은 거울처럼 반짝이게 했다. “이 고요는 오늘 내 몫으로 충분하다”라고 느꼈다. 눈 치우는 삽 소리와 들판에 덮인 침묵, 겨울 햇살과 보랏빛 황혼이 겹겹이 기록될 것이다. 그렇게 그날의 빈 도화지 같은 풍경 위에 하나의 페이지가 덧입혀졌다. 눈 내린 들판의 하루가, 결국 우리의 '기록의 자리'였다.